120. 허인백 야고보(1822~1868년)
허인백 야고보는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24세 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으며, 이후로는 아주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여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야고보는 아내 박조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고신극기는 물론 겸손과 인내의 덕을 쌓는 데도 노력하였다. 또 애긍에 힘써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난 뒤, 야고보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그리고 옥에 갇혀 50여 일을 지낸 뒤 경주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도 다시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8개월을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허인백 야고보는 울산의 죽령 산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김종륜 루카를 만나 함께 신앙 생활을 하였고, 나무 그릇을 만들어 팔아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처럼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그는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자주 순교 원의를 드러내곤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었을 때도 죽령 교우촌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가족들에게 이르기를 "나를 위해 기도해 주어라, 성녀 바르바라의 순교 행적을 기억하도록 하거라"고 당부하였다.
경주 진영에 이르자, 곧 문초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을 뿐 천주교 서적이 있는 곳을 대거나 다른 신자를 밀고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장은 화가 나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내 그의 몸에서는 피가 나고 다리뼈가 드러나게 되었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어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증거한 뒤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로 끌려나가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아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