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김원중 스테파노(?~1866년)
충청도 진천의 발래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 살던 김원중 스테파노는 본래부터 성품이 순량하고 온후하였으며, 열심과 신덕이 교우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 그의 이웃에는 사촌 김선화 베드로가 살고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관아에서는 이미 발래기 신자들에 대해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전갈을 보내와 "다시는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갖다 바치고 직접 관장 앞에서 다짐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전갈을 받은 발래기 신자들은 대부분 놀라고 두려운 나머지 관청의 분부대로 서적을 갖다 바치고, 관장 앞에 가서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때 스테파노만은 "내가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어찌 배교 행위를 하겠느냐?"고 말하면서 서적도 갖다 바치지 않고 관아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외교인들은 물론 발래기의 신자들까지도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 스테파노를 원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을 위해 모든 원망을 감수하였다.
1866년 10월 4일, 관아ㅏ에서는 다시 전갈을 보내와 "발래기 사람들은 모두 관아에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전해 들은 스테파노는 교우들에게 "이제 들어가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두 관아로 갈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달게 받을 정도로 시니덕이 깊은 사람만 관아로 가자"고 말하였다.
이튿날 진천 관아에서 포졸들이 왔을 때, 발래기 신자들 중에서 김원중 스테파노를 비롯하여 10명만이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들 일행이 관아로 들어가자 관장은 "일전에 갖다 바친 책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스테파노는 책을 갖다 바친 적이 없으면서도 "저의 책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관아에서는 즉시 그를 가두어 버렸고, 이때 신성순 회장과 2명의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겁에 질려 배교를 다짐하였다.
진천 관아에서는 25일 동안 이들을 가두었다가 10월 30일에는 모두 감사가 주재하던 공주로 압송하였다. 이때 스테파노는 공주로 압송되기에 앞서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주님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너도 아무쪼록 주님을 위해 열심히 수계하여 훗날 천당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여라"라고 당부하였다. 아울러 아내에게도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전하였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오, 자녀들을 잘 보살피고, 죽으나 사나 주님의 명에 순종하다가 죽의 뒤에 천당에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합시다. 나는 공덕이 없지만 주님의 도우심만을 믿고 천당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는 다시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마시오."
스테파노 일행을 인도 받은 공주 관아에서는 이들을 모두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어떠한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모두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으며, 12월 16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후 스테파노의 아우가 공주로 와서 이들 네 명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