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아기 안나
강원도 강촌 출신의 박아기는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였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하였다. 18세 때 비교적 부유한 교우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또 정성껏 그들을 교육시켰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박아기는 남편, 큰아들 응천(應天)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남편과 큰아들은 심한 고문으로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아기만은 배교를 거부하고 모진 고문을 이겨 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언제나 평온하였고 때때로 위문 오는 가족들에게도 권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배교하고 가족들에게 돌아가라는 형관의 갖은 유혹과 고문에도 박아기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5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