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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7 10:51

홍주 형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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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북문교 인근의 월계천변은 참수터인 형장
지역 충남 홍성

북문교 인근의 월계천변은 참수터인 형장

 


홍주의 순교터인 처형장, 즉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은 장소는 홍주성의 북문 밖, 즉 지금의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 북문교 인근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소향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지점에서 죄인들을 처형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홍주 성지는 기록상으로 211명(또는 212명)의 순교자와 700여 명의 무명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홍주(홍성) 순교 성지의 특징은 첫째 예비자들의 모범 성지이며, 둘째 박해 초기부터 말기까지 순교자가 나온 곳이며, 셋째 한국 천주교회의 핵심 성지라는 것이다.


첫째, 천주교에 입교하여 2년간 예비자로써 수계를 지키며 선교한 원시장(1732~1793, 베드로)은 신해박해 때 옥에서 세례를 받고 동사(凍死)로 순교했고, 장장 22년 동안 예비신자 생활을 하며, 거의 10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순교하기 직전 자기가 자기에게 세례를 주고 하느님을 영접한 이여삼(1770~1812, 바오로)은 바로 ‘예비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둘째, 1791년 전라도 진산 사건 때 내린 전국 천주교 신자 검거령으로 홍주에서 원시장 베드로가 충청도에서 첫 순교자가 되면서 정사박해(1797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까지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셋째, 홍주는 내포의 중심지로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이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세례를 받고 여사울에서 첫 선교를 시작한 후 내포 지역의 수많은 신자들이 홍주목에서 순교하게 됨으로써 핵심 성지로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홍주의 또 다른 순교터인 처형장, 즉 1801년의 황일광(黃日光, 1757~1801, 알렉시오)과 1868년의 유 마르타(1803~1868, 교수형의 가능성도 있음)가 참수형을 받은 장소는 홍주성의 북문 밖, 즉 지금의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 북문교(일명 덕산통) 인근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합수머리 지점은 본래 북문교 아래쪽이었는데, 훗날 도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북문교 위쪽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홍주 관리가 읍성 북문(북문교 남쪽 60~70m 지점) 옆의 치(雉)에 올라가 신호를 하면 그 신호에 따라 월계천변으로 끌고 간 죄인을 참수형에 처했는데, 그 치가 있던 곳은 지금의 북문 밖 월계천변에서 가까운 북문교 하류 200m 지점이었다. 또 원래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해 오던 곳으로, 갑오 동학란 때에는 동학군들을 여기에서 처형하였다고도 한다. 실제로 이곳은 일반적인 참수(斬首) 형장의 조건인 개천과 백사장이며,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 등 형장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866년과 그 후 2년 동안 이곳에서 많은 교우들이 잡혀 순교했는데, 《치명일기》에만도 83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조양문으로 끌려 들어온 많은 교우들은 관청 뜰 안에 있는 나무에 묶여 있다가 동헌으로 끌려가 심한 문초를 받아 죽기도 했고, 옥에서 굶어 죽기도 하였다. 이렇게 죽은 시체는 성 밖으로 내다 버렸다.

▒ 홍주와 홍성
지금의 홍성군은 조선 시대의 홍주목과 결성현이 합해져 이루어진 군이다. 홍주목의 고려 시대 이전의 역사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고려 초인 태조 대에 이곳에 운주(運州)를 설치하고, 현종 3년인 1012년경에 홍주(洪州)로 개칭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홍주는 충청도의 4목(충주, 청주, 공주, 홍주)가운데 하나로 1413년(태종 13년)에는 결성현을 설치했다. 따라서 홍주목은 내포 지역 통치의 중심으로 관할 영역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세조 즉위 직후 충청도의 4개 진관 중 하나로 홍주 진관을 설치하고 목사가 겸임하는 첨절제사를 두어 19개의 고을을 관할하였다.
일제는 191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에 민족 정기를 끊는다는 속심으로 ‘홍주군’과 ‘결성군’의 각 한 글자씩 따서 ‘홍성군’으로 개칭하고 11면을 관할하게 하여 현재(2읍 9면)에 이르고 있다. 충청도의 4목 가운데 ‘홍주’만이 유일하게 일제에 의해 본래의 ‘홍주’라는 이름을 빼앗겨 버린 채 ‘홍성’이란 이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오는 2012년 충남도청이 홍성으로 이전해 업무를 시작하게 될 ‘충청남도청 홍성 개청 ’연도인 2012년은 ‘홍주’라는 지명 역사가 ‘1000년을 맞는 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  순교자

◆ 순교자 황일광 시몬 (1757∼801년)   <하느님의 종 125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 시몬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렵게 생활하였다. 1792년 무렵, 홍산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우연히 이존창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다. 교우들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애덕으로 감싸주었다.  
1800년 2월 그는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 살고 있는 정약종 회장의 이웃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황사영(알렉시오), 김한빈(베드로) 등 여러 교우들과 자주 교류하였다. 그 후 정약종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하자, 시몬도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건하게 참아냈다. 그 결과 그는 다리 하나가 부러졌으며,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고 고향으로 보내 참수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시몬은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어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북문교 주변
 지리좌표  [북문교] 북위 36°36′26.8" 동경 126°39′73.1"
 연락처  홍성 성당 (홍성군 홍성읍 고암리 552-11) (041) 633-8891 FAX (041) 634-8891
 홈페이지  홍성 성당 http://px1004.hihome.com
 미사시간  [홍성 성당]
 평일 : (월) 오전 6:00, (화목금) 오후 7:00, (수목금)오전 10:00 (토) 오후 4:00, 7:00
 주일 : 오전 6:00, 9:00, 10:30, 오후 7:00 
 교통편  [승용차] 서해안 고속도로 홍성 IC에서 29번 도로 홍성읍으로 향한다. 홍성 읍내 군청 오른쪽 길로 조금
 가면 북문교가 나온다. 북문교를 건너나 우측에 형장터 기념비가 있다

  1. 홍주 형장터

  2. 홍주 조양문과 저잣거리

  3. 홍주 옥터

  4. 홍주 생매장터와 안장터

  5. 홍주 관아와 진영

  6. 정산 관아와 형장터

  7. 청양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생가터

  8. 청양 다락골 줄무덤

  9. 천안 성거산 성지

  10. 천안 성거산 목천 소학골 교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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