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오반지 바오로(1813~1866년)
오반지 바오로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는 담을 쌓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 되었는데, 어느 날에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로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그리스도교적인 체념으로 가난을 참아 견디었으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본분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 나갔다.
바오로의 열심은 이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 병영에서 퍼견된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지장골로 들아닥쳤다. 이내 그는 한 젊은이와 함께 체포되어 진천에 토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었으니, 이때가 3월 13일이었다.
청주 병영으로 압송된 오반지 바오로는 모진 형벌과 문초 가운데서도 교회 일을 조금도 누설하지 않았으며, 단지 '나는 천주교인이요'라는 말만을 되풀이하였다. 한번은 형벌을 받고 옥으로 끌려갈 때, 형리들이 몽둥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피가 솟아나자, 바오로는 대뜸 "나를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좋소. 하지만 관장의 명령도 없는데 왜 마음대로 때리는 거요"라고 항의하였다.
당시 옥에는 바오로와 함께 체포된 젊은이, 그리고 새로 체포되어 온 배 바오로라는 교우가 있었다. 관장은 이들 세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배교한다'는 한마디만을 얻어내려고 갖가지로 유혹하였지만. 바오로는 조금도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함께 갇혀 있던 동료들은 관장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바오로가 옥중에 있을 때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교우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고 남의 빚을 갚오록 하여라 그리고 만일 체포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하여라."
관장은 어떠한 형벌과 유혹으로도 바오로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이때 바오로는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오님을 배반할 수 없다"는 말로 신앙을 증거한 뒤, 청주 남문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런 다음 사형 집행을 관장하는 관리가 마지막으로 배교를 유도하기 위해 종이를 갖다 주자, 그는 끝까지 '배교한다는 말을 쓸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바오로의 옆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이처럼 바오로가 순교한 날은 1866년 3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백일 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이해 지장골로 옮겨져 그 인근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