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이조이 막달레나(1808~1840년)
이조이 막달레나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장성한 뒤 그녀는 금산 고을에 살던 김성서 프란치스코의 아우와 혼인하였으나 19세 때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죽기에 앞서 그녀에게 수계를 열심히 하도록 당부하였다.
남편이 사망한 뒤부터 막달레나는 오로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시부모에 대한 효도에만 전력을 다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 보다는 천주님께서 비교적 덕을 닦기 쉬운 처지에 두어 주신 것을 자주 감사하였다. 그녀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자발적으로 대재와 소재를 지키면서 극기를 실천하였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힘썼고, 무엇보다도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는 귀찮은 일을 기꺼이 맡았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조이 막달레나는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압송된 그녀는 문초를 받는 동안 과감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갖가지 형벌에도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옥으로 돌아온 뒤 막달레나는 자신의 괴로움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함께 있는 신자들이 끝까지 신앙을 증거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 데만 마음을 썼다. 그녀는 함께 있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무엇보다 천주님과 더불어 솔직하게 행동합시다. 그분께 충실하여 모두 함께 천국에 올라갑시다. 하나도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이어 감사 앞으로 끌려가 형벌을 당하는 중에도 막달레나는 한결같이 굳센 마음을 나타냈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40년 1월 4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녀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조이는 천주교 신앙을 신봉하여 천당 지옥설을 깊이 믿었으며, 죽은 남편의 훈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죽지 않고 살게 된다면 다시 천주교 교리를 배우겠다고 하였으니, 그 독함이 이를 데가 없습니다. 또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한다고 하였으니, 지체없이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